“선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요한복음 5:29)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특유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보편적 사건입니다. 선한 사람도 부활하고 악한 사람도 부활합니다.
성서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여럿 등장합니다.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그렇습니다. 그래도 저들은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저들의 부활은 저들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영혼의 새 창조입니다. “오해가 많은 사람보다 차라리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 낫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부활을 믿지 않는 것보다 부활을 그릇되게 믿는 것이 더 나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내세에 펼쳐질 환상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오늘 내 삶의 자리 안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이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1:25), 이 말씀은 현재시제로 되어있습니다. ‘나는 부활할 것이다’라는 미래시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오늘의 고통에 대한 내일의 위안이 아닙니다. 부활은 미래를 향한 소망이기 전에 현실의 삶에 대한 엄숙한 도전입니다. 무엇을 도전하나요? 증인의 삶입니다.
2천 년 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자 유대의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은 기를 쓰고 사도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습니다. 그 때 힐렐파의 랍비 가말리엘은 유대인들에게 사도들의 선포를 그냥 내버려두자고 제안했습니다. 사도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고,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사도행전 5:38,39).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검증에 맡겨보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두자는 뜻입니다.
가말리엘의 제안 그대로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외친 부활의 증언은 험난한 역사의 검증을 통과해 나와 기독교신앙의 확고한 신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떤 사이비 메시아를 따르는 무지한 신도들이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그 숱한 탄압과 박해를 무릅쓰고 순교의 피로써 부활을 증언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2천년 이상 수십억의 영혼을 사로잡아 삶과 인격을 변화시켜 온 것은 오직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증언뿐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마르튀스(mavrtu")인데, 여기서 영어의 마아터(martyr) 즉 순교(殉敎)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자신이 체험한 진실을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것, 이것이 참된 증인의 조건입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리거나 거짓 증언을 위해 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기가 몸소 겪은 진실이기에 죽을 각오로 증언하는 것이며 또 그처럼 목숨을 건 증언이기에 높은 신뢰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인 사도들이 순교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며 선포하는 우리들 역시 부활의 순교자적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종교적 명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삶에서 선포되고 인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고백의 입술보다 변화된 삶, 거듭난 인격이 먼저입니다. 부활이 인격의 체험이 되고 삶의 고백이 될 때, 비로서 당신은 예수쟁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