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분배받아 집을 나간 동생은 타락과 방탕을 일삼은 불효자입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를 성실히 모시는 형은 의롭고 모범적인 효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해버린 불의한 동생을 미워했고,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에게도 분노했습니다. 용서와 관용을 모르는 율법적 정의관념에서 솟아난 미움이요 분노입니다.
아버지는 효자인 첫째 아들 하나만 있는 것보다 불효자라도 둘째 아들까지 모두 함께 있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 첫째가 아무리 성실해도 불성실한 둘째의 존재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못난 자식일망정 그 둘째 없이는 아버지의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었습니다. 형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동생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형제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소외돼 있었습니다. 집밖으로 나간 동생은 그 몸이 아버지로부터 소외됐고, 집안에 남아있는 형은 그 마음이 아버지로부터 소외됐습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소외를 깨달은 동생은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형은 아버지의 마음과 동떨어진 내면의 소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한마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적이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올 일도 없었고, 돌아올 수도 없었습니다.
동생은 돌아온 탕자였고, 형은 돌아오지 않는 탕자였습니다. 아니 돌아올 수 없는 탕자였습니다.
"눈먼 자여, 먼저 안을 깨끗이 하여라. 그 뒤에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율법의 잣대로 남을 혹독하게 심판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의로움으로 자만해진 나머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있었던 것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사랑을 저버린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 탕자, 돌아올 수 없는 탕자였습니다.
불의한 동생을 미워하는 의로운 형처럼, 회칠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또한 흠 있는 이웃을 배척하고 허물 많은 형제를 용납할 줄 모른다면, 몸은 비록 하나님의 집에 있어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탕자, 돌아올 수 없는 탕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은 오직 하나, 내 의로움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돌이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돌아온 둘째입니까, 돌아오지 않는 첫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