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찾지 말고, 이웃이 되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의 말씀에 율법사가 물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렇게 반문하셨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거룩한 제사장도, 경건한 레위인도, 모두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못 본 체 그냥 지나갔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이었다.(누가복음 10:29~37) 이 유명한 비유는 질문과 대답이 어긋나 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물음에 예수님은 “너도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고 대답하신다. 이웃을 찾기 전에 스스로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는 말씀이다. 이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전락>에 이런 대목이 있다.
“클라망스는 어느 날 센 강 다리를 건너다가 난간에 기대 슬피 우는 한 여인을 보았다. 그는 여인이 강물에 뛰어들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순간 여인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뒤에 일어날 여러 귀찮은 일들이 떠올라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 일은 곧 잊혀졌다. 그러나 한참 뒤 언제부턴가 클라망스는 전락하기 시작한다. 강물 속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법적으로는 클라망스에게 여인을 구해야할 의무가 없었지만, 그의 양심은 여인을 구해야한다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것이 클라망스가 전략하게 된 이유다. 여러 나라에 <선한 사마리아인 법>(The Good Samaritan Law)이라는 법률이 있다. 급박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줘도 자기에게 별 손해가 없을 때에는 법적으로 구조해줄 의무가 있다는 규정이다. 우리 형법에는 이런 사랑 조항이나 선한 사마리아인 규정이 없다. 다만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긴급한 환자를 응급 처치하다가 본의 아니게 환자에게 해를 끼친 경우에는 민형사상 책임을 감면한다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날마다 읽고 듣고 마음에 새기는 신앙인들이 무슨 법률이나 사랑 조항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양심의 소리는 실정법이 있기 전부터 이미 마음속에 새겨진 사랑 조항이다. 이 양심의 소리는 더욱 우리를 성령의 음성으로 이끈다. 도움이 절실한 이들 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채 그 이웃이 되어주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인격의 전락이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우리의 물음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이웃을 찾지 말고,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라.” 당신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당신 옆에서 누가 힘겨워하는가? 누가 아파하는가? 누가 울고 있는가?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상과 기도로 성령 하나님께 민감한 자는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보여야 한다. 넘치는 교회는 나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웃을 찾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위해 이웃이 되어주려는 자들의 공동체다. 목장은 그런 곳이다. 하늘의 사랑이 구체화되는 곳이 목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