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명령(至上命令)
전 세계 기독교인이라면 기억하는 마태복음 28:18-20은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지상명령
(至上命令)이라고 부릅니다. 땅 ‘地’ 자가 아닙니다. 이를 ‘至’ 자입니다. 가다, 가다 이젠 더 이상 갈데가 없다, 이를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일 으뜸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 그 어디에도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 단정적으로 기록한 곳이 없습니다. 왜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까요? 마태복음 마지막에 있고, 승천하기 전 마지막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판단한 듯 합니다. 대위임령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말대로 지상 명령인가? 주님 주신 최고의 명령인가?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히11:6
하나님과 상관없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알도록 사귐을 갖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독자 이삭보다 더 사랑할만한 관계로 초청하시는 것, 믿음은 관계로 정의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관계와 과업입니다. 관계에 대한 명령과 과업에 대한 명령입니다. 믿음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관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마28장은 관계 이야기가 아니고, 과업에 대한 명령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현상’이 아니고 ‘대상’이 중요합니다.
이방종교와 샤머니즘 종교의 특징은 섬김의 대상, 절대자를 얼르고 달래고 어떤 종교적인 행위들을 해서 그 신을 감동시켜서 복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 행위, 현상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현상보다 행위보다, 그 대상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 현상은 이차적입니다.
어떤 종교적인 표현을 하는가,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가, 그래서 결과로 나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이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 신을 위해서 무슨 과업을 이뤄냈는가가 핵심이 아니라, ‘그 과업을 왜 했어, 도대체 누구 때문에 한거야?’ 대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서 똑같은 과업을 하고도 하나님의 평가는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율법적 과업 성취에 얼마나 성실했습니까?
그들의 도덕성은 얼마나 우수했습니까?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인데 사사건건 그들을 책망하셨죠. 심지어 독사새끼라고 욕까지 서슴없이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 5 :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의도하신 최고 지상명령이 뭘까요?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왜 ‘새 계명’이라고 하시나요? 신명기, 레위기에 이미 명하신, 조상 때부터 익히 아는 말씀이잖습니까? 차이가 뭘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구약과 다른 지점이 이곳입니다.
이 본문 앞뒤로 어떤 사건이 배치되어 있습니까?
위선자, 배신자들인 제자들의 발을 닦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을 주신 후 그 배신자들, 위선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오늘 이 새 계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너희도 이렇게 사랑해야 되는 거야.”
볼성 사나운 형제, 자매를 상대해 주고, 나를 악담하는 그를 용납해 주고, 위선적이지만, 배신자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 주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 사랑의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 至上命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