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욕망
모든 인간이 자아형성을 할 때, 나에게는 없는 어떤 것을 가진 타인, 즉 나 이외의 다른 인격체가 가진 것으로 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는데 그것을 대체욕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최진실이라는 배우가 자살을 했을 때 한국의 많은 주부들이 한동안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와는 일면식도 없는 여배우가 자살을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을까요? 왜냐하면 20년 이상을 TV 드라마나 광고 등을 통해 보아왔던 그녀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자아형성에 개입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는 것, 윤리나 도덕, 양심, 사회법에 의해 감히 저질러 버리지 못하는 것 등을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을 통해 대리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사유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슴 속에는 너무나 큰 공허의 구멍이 뚫려 있기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람보라는 영웅을 보면서 그 람보의 힘을 자신의 자아 속에 깊숙이 담아 놓습니다. 미국의 영웅주의는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비스타, 스포츠 스타, 정치적 스타, 온통 스타들을 만들어 놓고 자기의 욕망을 거기에 투사하여 대리만족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결핍에 의해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다른 대체욕망으로 채워서 자아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에 가장 큰 대체 욕망적 자아의 확장이 자식입니다. 부모라는 자아가 형성이 되는 데에 있어서 5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자식입니다. 왜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왜 그렇게 화가 날까요? 내 팔 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뇌성마비라고 합니다. 나는 밥숟가락을 내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나의 뇌에서 시키는 명령을 손이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화가 나요?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대체 욕망적 자아의 한 부분인 내 자식이 내 말을 안 들을 때, 마치 내 팔 다리가 내 말을 안 들을 때와 똑같은 분노와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위장을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집착인 것입니다.
교제를 하던 연인들이 헤어진 후에 서로 상대방에 대해 험담을 하고, 모함을 하고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건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에 대한 공허함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워내려고 하는 아주 악한 발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조차도 대체욕망의 충족이라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빈 곳을 상대방의 자원으로 채워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결혼 후에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욕망의 대상이 되어 달라고 요구를 하니 그 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 되어서 내 수족처럼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데 그 상대방도 나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거든요. 그러니까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알고 자기부인의 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가정에서 참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좀비처럼 피를 빨아서 자기의 행복을 채우려 하는 자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지 못하면 거기에는 항상 충돌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숙한 성도가 그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결핍 속에 빠져있는 세상은 반드시 다른 대체욕망으로 자아를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품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