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지만 헬라말 원문을 보면 제일 첫 글자가 ‘파테르’입니다. 아버지란 뜻입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은 아버지, 우리말로 ‘아빠’라는 말입니다. 이단 어는 본질적, 본체적으로 친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만 쓰이던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버지라는 말을 창조주요 구원자로서의 표현으로는 썼지만, 이렇게 ‘아바’ 혹은 ‘파테르’라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리고 혼자서만 쓰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불러라,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기도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즉,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성립이
전제가 되지 않고는, 기도가 시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사본을 읽다가도 아도나이 엘로힘, 여호와 이런 하나님의 호칭이 나오면 감히 입에 담지 못하고 묵음으로 처리했습니다. 감히 부를 수 없을 만큼, 높고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게다가 사본 학자들은 성경을 베껴 쓰다가도 하나님이 이름이 나오면 붓을 빨고, 목욕 후 다시 필사를 이어갈 만큼 하나님의 존엄하심과 영광스러움을 어마어마한 가치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뭘로 부르라고 가르치십니까? 아빠다, 아버지다... ...
이 단어가 왜 주기도문에 첫 글자에 배치되어 있는가? 기도는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대상입니다. 대상이 없는 기도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대상이 없습니다. 나한테 복만 주면 나무든, 돌이든, 하늘이든 상관없는 게 우상, 이방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대상이 계신 종교입니다. 근데 그분이 누구냐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아버지, 아빠라는 선언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 아저씨, 아저씨 정도로 만나며 사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조금씩 도와주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개념으로 성전을 드나드는 분들도 가끔 봅니다. 아버지이십니다. 그것을 고백하면서 인정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 그런데 그 아버지 앞에 무슨 수식어가 있는가 봤더니, ‘우리’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정의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상에서 육신의 혈연 가족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지 않으시고,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셔요. ‘보라, 네 어머니라, 어머니에게는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거기서 새로운 영적 가족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밑에서 영적 가족, 그게 교회라는 본질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우리 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라는 것은 개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도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을 지양하고, 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주기도문 강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