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내 죄를 탕감받는 조건이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인가? 오해를 낳는 주기도문의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것은 틀린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오해죠.
우리의 죄는 대차대조표 그리듯이 차감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탕감받은 용서의
은혜는 내가 수만 명을 용서한다고 해도 사해질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간단한 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여기서 이 죄는 ‘오페일레마’ 즉, 빚, 부채라는 단어입니다. 원문대로
번역을 해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빚을 탕감받은 것처럼 나도 탕감하며 살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왜 죄를 빚이라고 했을까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담’입니다.
빚이라고 하는 것은 갚아야 하는 부담감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죄의 또 다른 정의는 ‘갚아야 할 것을 갚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일만 달란트보다 더 큰 것을 받았습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너무나 많고 많아서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구원, 영원한 생명, 우리 삶의 재정, 건강,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 누리고 있는 환경 하나님께서 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의 빚진 마음이 있고, 그것이 부담이고, 그 빚은 하나님께 갚아드려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받은 바를 마땅히 갚아드려야 되는데, 그 방법으로 배려하신 길이 ‘이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영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갚아드린다는 표현이 어불성설이지만, 거룩한 부담과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조금씩 조금씩 갚아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를 얘기해주는 가장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송혜교 배우가 등장했던 ‘오늘’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남의 용서를 훔치고 도둑질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서가 안 되는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용서가 나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그 용서는 자기 의가 되고, 율법주의의 용서가 됩니다. 용서는 흘러가는 겁니다. 이웃을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갑니다. 주 예주 은혜의 강에 잠겨서 나도 모르게 흐릅니다.
혹여, 용서하고 싶은 사람을 향해 마음이 허락하질 않습니까?
그냥 두십시요. 용서가 숙성될 때까지 애쓰지 마십시오. 은혜라는 물이 흘러들어와서 용서가
흘러가도록 놔두십시오. 용서는 증오, 미움을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물이 들어와서
밀어내는 사건입니다.
- 마태복음 주기도문 강해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