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만취 사건, 저주는 왜 아들인가”
지난 8월 18일자, 복상(큐티) 본문에 보면, 창세기 9장 노아의 만취 사건이 등장합니다. 한 성도가 복상 중에 가졌던 의문을 나누고자 합니다. 시32:1절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가리움이라는 단어가 바로 23절에 셈과 야벳이 노아의 하체를 자기들의 옷으로 덮었다고 할 때 덮었다는 단어, ‘캇싸’입니다. 허물, 죄의 덮임을 받은 것은 복입니다. 복 중에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복을 받았기에 다른 사람의 허물과 수치도 그렇게 덮어주어야 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며 그것이 다 드러날 때 내가 당할 수치와 조롱이 얼마나 클지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수치와 나의 죄와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시기 때문에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수치를 즐기고 조롱하고 폭로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삶의 방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함은 술에 만취한 노아의 벌거벗은 몸과 하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몸과 하체를 보았다고 할 때 보았다는 히브리 단어는 ‘라아’인데 이것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을 넘어 즐기며 조롱하면서 보는 태도입니다. 알렸다고 할 때 ‘알리매’도 재미로 해설하고 누출했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잘못과 수치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설하면서 중계방송하고 조롱하고 재미있어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함을 두고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아버지 함의 잘못을 왜 아들이 뒤집어 씁니까?
함이 그 무서운 홍수심판 중에도 살아남은 것은 자기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자기도 홍수심판으로 멸망당한 다른 죄인들과 똑같이 마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하고 항상 악합니다. 그 죄와 그 허물대로 물으신다면 열두 번도 더 심판을 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악과 죄를 덮어서 심판 중에 살아남은 거죠. 그걸 안다면 누군가의 벌거벗음이 드러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롱하고 즐기고 누출하고 해설하고 중계방송하면서 재미를 느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은혜로 덮임받아 산 것처럼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함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함은 아비의 벌거벗음을 보고 두 형제에게 알리고 조롱하고 즐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누추함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렇게 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함이 아니라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냐는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은혜의 원리로 살아야 할 너희가 은혜를 망각하고 남의 수치를 드러내고 조롱하는 태도로 산다면 그것은 저주받을 자들의 삶의 태도이니까 지금부터라도 그러한 삶의 태도를 철저하게 고쳐서 아들들이 그런 식으로 살지 못하게 하라는 예언적 저주입니다. 반면에 함의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엄청난 실수을 들었을 때 담화하면서 조롱하고 즐기지 않았습니다. 이들도 노아의 실수는 인정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벗은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쳐서 어깨에 걸친 옷으로 노아의 하체를 덮어드렸습니다. 내 눈에 누군가의 벌거벗은 수치와 부끄러움과 부족함과 누추함이 보일 때 그것을 조롱의 대상이나 재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나도 얼마든지 동일한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경각심으로 자기를 돌아볼 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옷 입고 사는 성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