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경제가 깊은 불황의 늪으로 내몰렸고, 유럽은 가뭄으로, 서아시아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태풍 힌남노라는 이례적인 기상이변으로 우리나라도 적잖은 생채기가 남았다. 혹자는 21세기의 위험을 danger가 아니라 risk라고 지적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의 불가항력적 재난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위험 곧 정치․경제․사회적 환경과 결합되어 일어나는 재난이어서다. 윤리를 상실한 과학기술, 절제를 모르는 자본확장, 개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환경파괴 등이 주된 원인이다.
가치관이 붕괴되고 사회환경이 급속히 변질되면서, 마음의 불안과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전에는 배가 고프고 몸이 고달팠지만, 지금은 마음이 고프고 정신이 고달픈게 문제다. 그래서 불안과 좌절감을 위로하고 치유하려고 사람들이 애쓰고 연구한다. 그러나 영혼의 불안은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실존의 문제다. 다윗이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뼈가 떨리며 내 영혼도 떨리나이다. 나를 고치소서. 내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6:2)
철학자 하이데거도 불안을 실존의 근본적 정황으로 파악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시편 42:5)
시편 기자는 자기의 영혼을 타자(他者)로 대상화하여 '너'라는 2인칭으로 부른다.
나의 불안과 좌절을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뜻일게다. 왜 그래야 할까? 주체를 바꾸기 위함이다. 즉,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이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도우시리라."(시편 43:5 )
우리의 불안과 좌절을 줄곧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동행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위안을 얻게 된다. 그것은 곧 이웃에 대한 시선으로 연장된다. 내 고통만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불안에도 예민한 공감을 지니고 이웃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다가가는 것이 곧 사랑이다.
프란체스코는 치유의 영성을 이렇게 간구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