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하는 것이 종교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행위를 거부한다. 인간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은 없다. 즉 은혜, 용서, 저주, 생명, 이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길되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해석은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가 길로, 생명으로, 진리로 인간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간 쪽에서 뭔가 시작하는 것을 단절한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그리스도께서 마치신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애당초 그리스도처럼 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처럼 될 능력이 있었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의 관계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길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길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으니까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길삼아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길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을 인간에게서부터 출발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가를 알 수 있다. 인간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출발할 능력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이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본질이다. 많은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도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갈 능력이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자신을 과신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위험은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 더욱 심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복음을 안다’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과신이 되어서 입으로는 주님의 은혜로 믿는다고 하지만 이미 그 속마음은 ‘나는 믿고 있다’ ‘나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다’는 자기 과신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쉽게 그리스도 편에 세우고 세상 모든 믿음에 대한 판단자로 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아담의 관계에서 말하는 것은 죄인과 의인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이 심판과 사망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생명에 이르렀다. 그러면 많은 사람에 해당된 자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죄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자다. 신자가 예수님의 인간성을 반사하면서 그가 참된 인간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자를 위해서 십자가 지고 피 흘리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복음 전하는 자로 삶을 드리는 것은 마땅한 사명이요, 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