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 속을 떠나야 한다”
-나태주-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너는 내 가슴 속에서 성숙한 열매로 익어가던 9월, 그 끝자락에서 사과도 대추도, 그리운 이마저도 그렇게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세월이 야속하다. 결실의 가을을 앞두고 아직도 봄의 설렘이나 여름의 정열에 마냥 취해있는 사람은 없다. 40에 불혹이요 50에 지천명이라, 개인이든 교회든 장년의 원숙기에 이르면 분주했던 여름의 열기에서 벗어나 오롯이 성숙한 열매의 가을을 기다리기 마련이다. 가을은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고 내 삶 속에,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가운데 지금 무슨 결실이 움트고 있는지, 깊이 묵상하는 계절이다. 9월이 가면, 파릇한 봄의 아침과 짙푸른 여름의 한낮을 뒤로하고 생명의 끝을 바라보는 가을 저녁에 이른다. 한 해 동안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라고 가을 바람이 속삭이듯 한다. 하루의 진실은 아침이나 대낮이 아니라 하루 온종일을 살아내고 맞이하는 황혼녘에야 비로소 날개를 펴듯이, 해 마다 반복하는 결실의 욕망은 깊은 사색의 밤에서 주님과 소통케 된다. 9월이 가면 곧 낙엽이 질 것이다. 만물의 생명력이 시들어가는 9월의 끝은 그 황홀한 낙엽의 때, 생명의 의미를 숙고하는 시간이다.
유대력의 7월인 티슈리월은 우리의 9월과 10월에 해당한다. 그 한가운데,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대속죄일(大贖罪日)인 욤 키푸르(יום כיפור)가 있다. 이날은 한 해 동안에 지은 죄와 허물을 뉘우치고 금식하는 날이다.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남에게 무언가 요구하며 떼를 쓰는 투쟁수단이 아니다. 목숨 걸고 제 삶의 길을 돌이키는 참회의 결단이다.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띠거나 얼굴에 보기 싫은 모습을 나타내지 말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복음 6)
9월의 끝, 속죄일의 금식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금식이요 단식이다. 한 해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색의 시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