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지녀야 하는 정체성을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3-15절)
여기서 ‘소금’과 ‘빛’이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임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우리 넘치는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의 목적 중 하나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 이다.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될 수 있기 위해 교회는 ‘주차장’이 아닌 ‘주유소’가 되어야 한다. 즉, 교회는 성도들이 머무는 주차장이 아니라, 영적으로 재충전하고 재무장 후 다시 세상으로 가야 하는 주유소인 셈이다. 주님 말씀하신 ‘소금’과 ‘빛’은 각각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먼저는 소금이 지니는 성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절)
소금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질은 바로 ‘짠 맛’에 있다. 이 짠 맛으로 인해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음식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방부제가 되었건 음식의 맛을 더해주건 간에 소금의 역할을 위해서, 소금은 반드시 녹아야 한다.
과거 팔레스타인 지역 소금에는 불순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소금 관리를 잘못하면 그 소금은 소금의 짠 성분은 모두 녹아버리고 불순물만 남는 경우가 있었다. 이 불순물은 소금처럼 흰 가루의 모양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쓸모없게 되어 버려졌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가치가 없이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히고 마는 불순물일 따름이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또한 이 세상의 빛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빛 또한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4-15절)
15절에 ‘등불을 켜서’에서 ‘켜다’는 헬라어 동사 ‘카이오’다. ‘태우다’는 의미이다. ‘켜다’는 말은 스위치를 올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름을 연료로 스스로를 ‘태워서 빛을 낸다’는 의미다.
이 등잔을 밝혀서 그릇 아래에 두면 빛은 소멸될 것이다. 등경에 걸어두면 온 집안을 환히 비추는 빛이 된다. 과거 유대인들이 살았던 주거지는 주로 야트막한 산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 주거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그 주변은 농경지나 목초지가 대부분이었다. 밤길 가는 나그네들은 한 점의 빛도 없이 깜깜한 들판을 지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산 위에 있는 주거지의 불빛은 이들에게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소금, 이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녹이고 태우는,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고통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녹지 않으면 소금이 그 맛을 낼 수 없듯이, 태우지 않으면 빛을 밝힐 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스스로를 녹여야 하고 불살라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가?
스스로를 녹여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스스로를 태워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이 어려운가?
주님께서 이미 온전히 그리하셨다. 먼저 가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 손을 꼭 잡으면 된다. 우리의 손을 붙들고 계시는 그분께서 우리 또한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