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네가 구원을 이루라고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구절을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만나게 된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구원이라는 건 노력하고, 힘쓰고, 애써서, 이루어 가는게 아닌데,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지, 서서히 이루어가는 과정이 아닌데?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맞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이미 구원 받았다’ 라는 과거 완료형으로 쓰인 경우도 있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구원을 이루어 가라’라는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 둘 다가 사실이고 이 두 구원의 관계를 제대로 따라갈 때, 비로소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게 된다.
‘이미 구원받았다’ 라는 과거 완료형의 구원은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칭의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인정해 줬다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구원은 절대로 ‘칭의’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전한 구원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와 영화의 과정을 거쳐 가야만 된다. 일부 신학에서는 칭의를 받으면 성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성화는 나 자신을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순종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 십 여년 전 청년 시절 때 재미있는 전도지를 하나 본 기억이 난다. 제목이 ‘30cm가 모자라서 천국에 못 간 사람’ 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전도지를 살펴봤더니, 이런 내용이다. 사람의 머리에서 심장까지의 거리가 30cm다. 머리로 지식적으로는 구원이 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뭘 이루었는지 알고 있지만, 내 마음속 삶의 중심에까지는 그 구원이 이르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었다. 동감이 되었다. 제대로 믿는다, 구원받았다는 건, 지적 동의가 아니라, 그 믿음의 내용이 나의 삶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과연 우리는 그런가? 영어 단어에 보면 ‘믿는다’라는 말들, ‘Believe’라든지 ‘Trust’라든지 이런 단어 뒤에는 항상 ‘in’ 이라는 전치사가 따라온다. ‘Believe in’ , ‘Trust in’... 헬라어도 그렇다. ‘엔’ 혹은 ‘에이스’ 항상 전치사가 붙는다. believe란 단어는 원래 전치사를 동반할 수 없는 동사다.
그러나 실제로는 believe는 항상 전치사 in과 함께 다닌다. 직역하자면 ‘~을 믿다’가 아니라 ‘~안에 믿다’라는 의미다. 왜 일까? 헬라어 피스티스에서 파생된 용법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 안에 믿다’라는 이런 의미가 됐을까?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 “연합” 혹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 이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와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를 신앙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그, 믿음이 나(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만드는 신비가 연출된다. 즉, 예수에 대한 믿음이 나(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음으로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연합을 이룬다. 그래서 그 믿음의 결과로, 나(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과 동일(동등)한 효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건, 그 믿음의 내용이 나를 지배하는 상태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주일 기독교 에센스 ‘구원 시리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