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역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끝부분에 있는 여주인공의 독백이다. 원작에는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Tomorrow is another day.)로 되어있다. 일본어 번역은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인데, 우리말 번역이 가장 탁월하다. '오늘의 역경에 좌절하지 말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을 새 희망으로 맞이하라’는 뜻일게다. 그런데 내일 떠오르는 태양도 실은 새로운 태양이 아니다. 지금껏 있어 온 그 태양이다. 오늘의 태양과 내일의 태양이 다르다면 종말적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옛 태양이 오늘의 태양이고, 오늘의 태양이 내일 떠오르는 새 태양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Ad fontes) 문예 부흥과 종교개혁의 이상이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어떤 일도 끝에 다다르면 근본의 옛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과 삶의 이치다. “가장 낡은 것 속에 가장 새로운 것이 있다.” 장장 16년에 걸쳐 티베트 고원 라다크 마을의 원시적 삶을 몸소 체험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The ancient future)의 주제다. 머나먼 과거를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와 합쳐놓은 이 책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과거와 미래의 두 시간적 영역을 하나의 장으로 엮어낸 우주적 통찰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 먹는 일을 겁내지 않는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대로 각기 좋은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늙어도 낡지 않는 지혜를 라다크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옛 지혜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만나는 것마다 옛 것이 아니니, 어찌 빨리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송나라 때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실린 왕효백의 글이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옛 것이 아니라 새 것’이라는 말인데, 기가막힌 발상의 전환이다.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뜻한다.” 새뮤얼 얼먼이 노래하는 청춘이다. 옛것이 늘 옛것 아니고 새것이 언제나 새것 아니니, 서로 다툰들 무슨 보람 있으랴.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 또 먹으면 더 늙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낡아가는 것이다. 새해를 보지 못한 채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다. 저들이 그토록 바라다가 끝내 만나지 못한 새해를 우리가 어찌 탄식하며 어영부영 맞을 수 있겠는가. 늙음은 은총이다. 감사할 일이다. 그 감사가 늙어도 낡지 않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