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울분에서 ‘을사년시럽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 뒤에 ‘을사년→을시년→을씨년’으로 변했다. 120년 전의 을사년은 우리 민족에게 을씨년스러운 해였음이 틀림없다.
올해도 을사 년, 뱀띠 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로고는 뱀 한 마리가 감겨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 물고 온 약초로 죽어가는 환자를 살렸다고 한다. 뱀이 치유와 재생의 상징이 된 이유다. 한 해에도 여러 번 허물을 벗고 다시 새 몸으로 성장해가는 뱀은 재생과 변화의 상징이 되었고, 알을 많이 낳는 다산성 때문에 복과 풍요의 화신으로도 인식되었다. 뱀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둥근 모습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삶과 죽음의 윤회라는 문화적 변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독일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는 뱀들이 사슬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춤추는 꿈을 꾸고 나서, 탄소 여섯 개와 수소 여섯 개로 고리를 이룬 육각형의 벤젠 구조(C6H6)를 찾아냈다고 한다.
많은 뱀이 독을 품고 있다. 모두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런데 까치살무사라고 불리는 칠점사의 맹독에서 항암물질을 추출하는 실험이 성공했다. 치명적 질병인 암을 치료하는 약이 치명적인 뱀독에서 발견된 것이다. 약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르마콘에는 독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다. 영어의 파머시(pharmacy)가 여기서 나왔다.
“너무 길다.” 쥘 르나르가 단 두 개의 단어로 쓴 <뱀>이라는 시다. 뱀으로부터 비롯된 죄의 역사가 오래도록 길게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뱀은 선으로, 하나님은 악으로 판단했다. 선과 악이 부딪치는 뒤틀린 인간 역사의 시작이다.
허물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썩어가는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죽는다. 을사년 올 한 해가 1905년처럼 을씨년스러운 독사의 해가 아니라 딱딱한 껍질을 벗고 영육 간에 새로운 변화와 쇄신의 해가 되는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