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겠습니까?"(1절) 지난주 본문 5장 20절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을 코로나19 진단키트에 비유합니다.
검사(율법)를 많이 할수록 확진자(죄)가 많이 드러나지만, 그럴수록 치료(은혜) 받는 사람도 많아진다는 논리인데,
이를 오해해 "그럼 죄를 더 지어야 은혜가 커지겠네?"라고 시비를 거는 것이 6장 1절의 질문입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에 감격한 나머지 "또 가출해서 탕진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정신 나간 논리입니다.
1. 은혜에 대한 두 가지 오해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와, 구원받았으니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도덕적 방임주의'(현대의 구원파적 사고) 모두 복음의 왜곡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되,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삶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력으로 안 되지만 성화는 자원함이 필요합니다. 늪에 빠진 사람처럼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존재를 구원자가 건져주듯, 마약·알코올 중독이나 성중독·쇼핑중독, 분노·우울 같은 감정적 중독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힘과 지위로 무마시켜주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아이를 망치는 길이듯,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다시는 그 죄로 돌아가지 않도록 붙잡아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를 '마중물'에 비유합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 부어지는 동시에, 우리가 그 은혜에 반응하여 일어나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나도 정죄하지 않겠다"에 이어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결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3~5절)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새 생명이 들어오면 임신처럼 체질이 바뀌어, 옛날에 좋아하던 거짓말·술·담배가 역겨워지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잔당'은 여전히 남아 있어, 검은 말(옛사람)과 흰 말(새사람) 중 누구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비유처럼, 새 사람에게는 말씀과 기도로 계속 공급하고 옛 사람은 굶겨 죽여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잘 죽는 연습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즉, 죽는 것입니다.
3. 정죄감과의 싸움 (11절)
사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죄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너 같은 죄인이 무슨 개혁을 하냐"는 속삭임에 시달렸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로 나의 죄를 사해주셨다"고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C.S. 루이스의 표현처럼 우리는 자격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존재이며, 느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고급 입맛이 다시 저급해지기 어렵듯, 하늘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세상 향락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인생이 아니라 은혜를 붙들고 씨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 때 넉넉히 승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