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이 옆에 앉으셨습니다.
지난 두 주, 로마서 7장을 지나며 "신앙은 정답보다 풀이과정"이며 "신앙에는 오답노트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해답지(율법)를 주셨고, 우리는 그 해답지를 붙들고 풀다가 자꾸 틀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바닥을 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8장은 그 신음소리 바로 다음 문장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음과 선언 사이에는 일주일이 아니라 쉼표 하나가 있었을 뿐입니다. 수학학원에는 세 종류의 선생님이 있습니다. 해답지를 주는 선생님, 오답노트를 시키는 선생님, 그리고 옆자리에 앉아 연필 잡은 손을 지켜보는 선생님입니다. 아이가 달라지는 것은 세 번째 선생님이 붙었을 때입니다. 해답지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혼자 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7장까지가 해답지와 오답 노트였다면, 8장은 선생님이 내 옆자리에 앉으신 이야기입니다. 아니, 옆자리 정도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사시는 이야기입니다. 1절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조건을 잘 보아야 합니다. "잘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행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위치를 묻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면, 갑판에서 팔을 젓지 않아도 배가 갑니다. 이번 주에 좀 못 살았어도, 그 배에서 내리지만 않았다면 괜찮습니다. 9절에 "거하시면"이라는 단어는 지난 주 7장 17절의 "거하는 죄"와 같은 말입니다. 7장에서는 죄가 세 들어 살았고, 8장에서는 성령님이 사십니다. 집은 그대로인데 세입자가 바뀐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목사 토마스 찰머스는 "새로운 사랑이 밀어내는 힘"이라는 설교에서, 나쁜 것을 억지로 빼내려 하면 더 세게 움켜쥐지만 더 좋은 것을 손에 쥐여 주면 스르륵 놓게 된다고 했습니다. 죄와 싸워 이기려 하기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5절은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여기 "생각한다"는 단어는 마음이 그리로 쏠린다는 뜻입니다. 운전할 때 장애물을 피하려고 뚫어져라 쳐다보면 오히려 그리로 핸들이 꺾입니다. 그래서 운전을 배울 때는 장애물이 아니라 빈 공간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죄만 노려보면 그리로 끌려갑니다. 안 보려고 애쓰기보다, 볼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11절은 이 본문의 절정입니다. 지금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 영입니다. 좋은 가전제품을 다 들여놓아도 전기가 안 들어오면 짐일 뿐이듯, 발전소는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스위치를 올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십 년째 못 이기는 습관 하나가, 무덤 문을 여신 그분께 정말 큰일이겠습니까.
이번 한 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늘 나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소리 내어 선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는 순간에는 자책 대신 손을 들어 "성령님, 여기서 도와주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혼자 풀지 않습니다. 무덤을 여신 그 영이 이미 내 안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