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 앨봄이 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다.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교수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2016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8만1천명이다.
1년에 용인시 인구의 30% 정도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엄청난 숫자임에도 나와는 상관없이 들린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끼는가?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우리에게도 반드시 일어날 소망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동일한 고난 앞에서도 기쁨과 담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철 스님에게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딸이 자기를 만나러 산으로 찾아 왔다.
성철이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장좌불와 경건 수행할 때였다.
딸이 장성해가지고 자기 생부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고 산으로 찾아왔는데
성철이 안 만나 주고 동자승을 통해서 한마디 말을 전한다.
“너와 나의 부녀의 인연은 죽으면 그 뿐인 것을, 허무한 인연을 더 이어 서로에게 아픔만 남길 이유가 뭐 있겠느냐? 나를 볼 생각 말고 그냥 돌아가라”
죽으면 끝인 허무한 인연을 자꾸 생각해봐야 고통만 더한다는 말이다.
이게 불교의 세계관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고백하는 찬송의 가사처럼,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존재들이지 허무한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소멸이 아니라 부활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부활은 이제는 다시는 죽지 아니할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
그걸 덧입는 사건이다. 그것이 또한 구원이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을 보라.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세요. 천사를 보내셔서 저 악인들을 처리하고 저를 살려 주소서“ 하지 않았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 옵소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
우리의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기는 것 뿐 이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이 땅 살아가면서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소망이 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17.4.16. 부활주일 설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