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말이 있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눈은 물체를 응시하고 있으나 뇌는 그렇지 않은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터널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이라든지, 사람사이 갈등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곡해하는 경우 무주의 맹시이다.
무주의 맹시가 오래도록 고착화 된 사람들과는 대화와 소통에 참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무주의 맹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 탕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핵심을 간과한 것들이 여럿 있다.
누가 탕자인가?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떠난, 배은망덕한 둘째 아들인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물에 동감하지 못한 큰 아들인가?
탕자의 비유, 그런데 이것이 누굴 타겟으로, 말씀하신 비유일까?
탕자의 비유본문이 시작되는 누가복음 15:1-2을 보면, 이 비유의 일차 적용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말씀을 듣고 또한 더불어 함께 식사하였다(15:1)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더불어 식사한다’고 예수님을 비난하며 그 식탁교제를 비난하였다.
이들을 향해, 오늘 비유들이 주어졌다(눅15:3)
정말 비유를 들어야 할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바래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한다.
집나간 탕자에게만 항상,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 않았던가?
이 ‘탕자 비유’의, 실제적용 당사자가 누구일까?
구원 받아야 할, 당장 돌이켜야 할 탕자가 아니다.
그 영혼을 구원해야 할, 살려내어야 할 책임이 있는 첫째 아들에게 초점이 있다.
그 첫째 아들이 바로 나와 당신이다.
아버지 마음을 외면하며 살아왔던 큰 아들처럼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나 혼자만의 구원, 나 혼자만의 복과 은혜만을 구하며 살았던 내가 큰 아들이요, 우리가 탕자인 것이다.
결국 이 기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불행히도, 첫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늦게나마, 금가락지 끼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파티 장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온 동네 사람들, 아버지, 심지어 돌아온 탕자까지도, 이 기쁨을 자리에 있다. 그렇지만 형은, 문 밖에 있었다.
아버지 마음을 저버린 큰 아들은, 진정한 신앙의 기쁨을 놓치고 살았다.
‘자기 의’, ‘똑똑’, ‘율법’을 앞세운 사람, 그래서 신앙 가운데 기쁨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큰 아들처럼 타인과 심지어 교회를 향한 비판이 서슴없다.
결국 ‘자기 의’에 사로잡혀 기쁨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보다 자신의 의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한다.
그래서 마음이 퍽퍽하고 건조하다. 사랑의 연출은 있을 줄 몰라도 가슴이 없는 것이다.
누가 탕자인가?
<2017.5.21. 주일설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