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1970년대 중반 족보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일이 있었습니다.
알렉스 헤일리가 소설<뿌리>가 화제가 되면서부터 입니다.
1750년 고요와 평화의 마을 감비아의 한 부락에 사는 한 소년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대서양을 건너 미국 버지니아 농장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몇 번이나 탈출을 기도했지만 실패했고 마침내 발목을 잘립니다.
그의 딸은 다른 백인에게 팔려가 능욕을 당하고, 평생 그렇게 노예로 적응하며 살아왔다는 비극적 체험들이 생생한 필치로 그려져 있습니다.
작품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의문이 무엇인가요?
왜 미국사회에서 흑인이 백인에 비해 뒤처지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백인들은 자신의 출신 뿌리를 줄줄 알지만, 흑인은 노예로 와서 뿌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끈질긴 조사와 천신만고 끝에 7대에 걸친 조상의 비극을 파헤치고 드디어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뿌리의 근원을 찾게 된다는 실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골로새서2:6)
예수님에게 뿌리를 내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신앙의 출발이라는 것은 2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헬라어 크리스토스는 구세주, 구원주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메시아 같은 말입니다.
나의 죄와 저주와 죽음을 해결하신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내 인생의 죽음, 허무, 수수께기 같은 영혼의 문제 나를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예수는 주(Lord)라는 고백입니다.
내 삶의 내 모든 것, 시간, 물질, 심지어 내 몸까지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을 일컬어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종교인들의 특징은 내가 가진 시간, 물질, 정성 등으로 절대자 신과 거래하려 합니다.
지극 정성을 다하고, 신을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목적한 바를 성취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종교행위이나 신앙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동사 ‘피스튜오’라고 합니다.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어 항상 목적어를 수반하는 독특한 관용어구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내용보다 그 목적되시는 대상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믿음의 대상보다 변화될 환경과 기적을 기대하는 것, 사람 기준으로 큰 믿음, 작은 믿음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의 대상되시는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받았으니’ 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 ‘람바노’의 합성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을 보다 세밀하게 번역해 보면,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취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받는다”라는 말은 요1:12에는 “영접한다”고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뿌리를 견고히 하여 믿음의 대상되시는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매일 새롭게 이루어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