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한일서3장1절
<보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감탄사입니다. 무엇을 감탄합니까?
‘어떠한 사랑’이 단어에 모든 것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용서와 사랑, 오래 참으심, 자신의 몸을 던지시는 헌신. 우리는 그 사랑의 분량을 결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일부라도 내 영혼이 인식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
그 사랑의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지금 예배자로 서게 되었다는 것,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 모든 것이 감격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제공한 사랑을 당연히 여기듯,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벼이 여기거나 자주 망각합니다.
자녀들 앞에 차려진 밥 한 그릇이 거저 된 것이 아니요, 배후에 부모님의 눈물과 헌신이 담긴 것처럼, 오늘 누리는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여기 넘치는 교회가 세워진 것, 이 예배당 안에 함께 앉은 것,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는 것,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있는 것, 장차 이 땅의 삶이 끝난 후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게 된 것,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 그리고 날마다 읽고 듣는 말씀, 기도할 수 있는 자유와 믿음, 늘 우리 곁에 함께 있는 가족들과 믿음의 동료들.... 이 모든 것들이 거저 된 게 아닙니다.
하늘의 새가 날 수 있는 것은 날개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배의 강한 엔진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배를 떠받쳐 주는 물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이 ‘먼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먼저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선재적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오늘 이 감사와 복을 주시기 위해 먼저 말할 수 없는 희생과 사랑을 하셨던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사람이 벌레들 속으로 들어간 것보다 더한 수치요,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몸을 찢기시고, 피를 쏟아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적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향 땅을 바라보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마셨던 청량한 물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15절입니다.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세 사람의 용사가 블레셋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물을 길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을 사랑하는 부하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적진의 칼 숲으로 뛰어들어 길어온 물이기에 그것은 물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값을 측정할 수 없는 부하들의 사랑이요, 피라고 고백합니다.
그 한사발의 물이 그냥 흔하디흔한 물이 아닌 것처럼,
매일 일상으로 누리는 하루하루의 은혜가 그냥 흔한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