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불안, '믿음의 시련'을 의미하는 독일어입니다.
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씨름과 갈등을 뜻하기도 합니다.“나의 불안(Anfechtungen)이 나를 사로잡은 그곳에서 깊은 탐구를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루터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고통스러운 믿음의 과정 중에 영적 갈등과 불안을 루터는 이 단어로 묘사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며 심판을 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나라 바벨론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와 갈등을 겪었던 하박국 선지자의 고뇌와 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직면해야 하셨던 십자가의 딜레마, 예수님에게도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만큼의 두려움, 갈등, 믿음의 시련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이 ‘안페이퉁’입니다.
두려움과 가책으로 살던 루터가 선택한 방법이 무엇이었나요?
바로 고행과 율법 준수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향한 코스프레는 될지언정, 믿음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다른 말로 <의>라고 하는데,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다른 의를 얻든지 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를 빌려줄 사람이 있나 종교가 있나, 철학 가운데 있나 찾아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의를 나눠주거나 빌려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의를 가진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의를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의를 나눠주실 분은 딱 한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의로운 분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예수님 안에 있는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 외에는 우리에게 의를 주실 분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는 <오직 믿음, sola fide>을 가장 기본적인 진리 중 하나로 붙잡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나 종교적 열심에 의해 ‘안페이퉁’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심판하시는 정의를 위한 의가 아닙니다. 죄 가운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 ‘신실함’의 ‘의’라는 것을 루터가 깨닫습니다. 이는, 마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어지는 전환이었습니다. 믿음의 대변혁이었습니다.
이 확신을 근거로 로마 카톨릭의 거짓 신앙과 면죄부 판매, 종교 기득권에 맞서 신앙 개혁의 불을 지핀 것입니다.